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전 기사단 (문단 편집) === 성지에서의 모습 === [[파일:터키 바그라스2.jpg]] 1153년 [[안티오크]]의 북쪽 관문인 누르 산맥의 아마누스 고개를 방어하기 위해 템플기사단이 건립한 바그라스 성채. 구호기사단에 밀리긴 하지만 템플기사단 역시 축성술이 뛰어났다. 세가 불어난 기사단은 우트르메르 각지에 영토를 두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단원의 숫자는 가장 많았을 때도 1만 명 안팎이었으므로[* 평민 기사와 종군 사제들을 모두 포함한 숫자이다. 실제 서임받은 기사는 훨씬 적었다.] 이들은 각지의 요새를 바탕으로 활동하다가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나 영주들이 요청할 때 규합되어 전투를 벌였다. 넓은 영토를 적은 병력으로 지켜야 하기에 항상 부족한 병력 수급 상황, 그리고 '''수도회'''로써 창설된 기사단의 특성상 평민이나 하층민도 성전 기사단원이 될 수 있었다. 물론 평민 기사(혹은 하사관)라는 계급이 따로 있었지만, 이들도 기병으로 복무하였고, 각 함대나 지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데다, 이들을 위한 고위 칭호가 따로 있었던 만큼 큰 차별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 기사단은 부족한 인원의 보충을 위하여 이교도들도 용병 병력으로 사용하였다. 많은 사료들에서 성전 기사단이 전투나 방어전에서 [[투르코폴레스]] 용병을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들은 [[구호기사단]]과 라이벌 각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안티오크 공국]]의 경우에는 두 기사 수도회가 내전의 양측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안티오크의 노르만 영주들은 대대로 성전 기사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안티오크 시내의 일부 지역과, [[아르메니아 왕국]], [[동로마 제국]]과의 국경인 바그라스를 성전 기사단에게 양도하기도 하는 등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반대로 구호 기사단은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들과 연대하여 이들이 안티오키아 내에서 가지고 있는 영유권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결국 계승 문제로 내전을 벌이던 안티오키아 공국 내에서 각각 친 아르메니아파, 반 아르메니아파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것. 자세한 사항은 [[안티오키아 공국]] 문서 참조. [[킹덤 오브 헤븐]] 등의 매체에 나온 광신도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집단이었는데,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무슬림 순례객들도 보호해줬고[* 예루살렘의 성지에서 예배를 보던 무슬림이 그리스도인에게 꺼지라는 말을 듣자 이를 저지하고 사과한 기록도 있다. 심지어 무슬림 방문객이 성전기사단을 '''친구'''라고 표현하기도.] 무슬림 용병이나 보조군을 동원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